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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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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김정희 作 자화상, 

화선지(종이)에 담채,32cm X 23.5cm, 19세기,


55세부터 시작된 제주도 귀양살이는 63세가 되어서야 해배(귀양을 풀어줌)가 되어 더디어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장동 월성위궁은 이미 안동 김씨가 차지해 예산 향저에 몸을 추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서울 한강 노량진 건너편 용산 쪽에 작은 거처를 마련하여 지냈습니다. 이 시기를 강상(江上)

시절이라 부르는데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제수 음식 조차 타인의 도움으로 마련하는 시절이었지만, 왕성한 예술적 

활동으로 추사하면 떠오르는 명작들이 거의 이 시기에 쓰여지고 그려집니다. 잔서완석루(残書顽石樓), 불이선란(不二禪蘭)등이 

이 시절의 작품입니다. 이 시기에도 불교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산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적은 "山寺"라는 詩와 

은혜사(銀海寺) 현판 및 대웅전(大雄殿), 백흥암의 시홀방장(十笏方丈)등 여러 사찰의 현판 글씨를 쓰고 여러 스님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온한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안동 장씨에 대항하던 추사의 벗이자 후원자였던 영의정 권돈인이 헌종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에 안동 김씨의 공격으로 

관직에서 쫒겨난  것으로도 모자라 그 배후에 김정희가 있다고 주장하여, 결국 추사는 북청(지금의 함경북도-북청도호부)에 유배를 보내 집니다.

66세에 병약해진 추사 선생으로서는 정말 억울하고 또 답답한 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김정희는 "하늘이시여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라고 울부짖었다 합니다. 고단하고 고달픈 북청 생활에서도 학문적 열정은 식지 않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고, 석노라고 부르는 돌 화살촉을 주워 숙신의 유물임을 증명 하였습니다. 

또한 침계와 석노시(石努詩)라는 명필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2년간의 북청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와 과천의 과지초당(瓜芝草堂)을  오가며 생활 하였습니다.

과천의 과지초당은 추사 선생의 아버지 김노경의 묘 바로 앞에 아버지가 마련해 두었던 작은 별서(別墅) 였습니다.

이곳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은 71세로 죽기전까지 4년간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의미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던

기상과 학문적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고, 몰락한 양반가의 울분 또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렸고 이즈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한 점을 남겼습니다. 의관을 갖추고 위엄있게 그려진 보통의 초상화와는 달리 탕건을 쓰고 평상복을 입은

촌로(邨老)의 모습입니다. 왼쪽 어깨는 오른쪽에 비해 약간 올라가고 몸은 마르고 얼굴은 다소 초췌한 모습입니다.가는 먹선으로만

그려진 얼굴은 머리카락과 수염, 구렛나루를 비교적 섬세하게 그렸는데, 정리가 되지 않아 이리저리 헝클어진 모습 그대로 입니다.

주름은 깊게 패여 살아온 날이 고됬음을 알겠고, 입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듯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마치 어느날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모습 그대로 그린듯 합니다. 모든 것이 어리숙해 보여도 눈빛 하나는 형형합니다.

언뜻 보아 거칠고 평범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과천시절 세상의 아무런 원망과 후회도 없고 남들에게 뭐하나 자랑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던 그 모습 그대로의 자화상 입니다. 불필요한 기교가 없는 담박한 그림이며 주인공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우리나라 초상화의 

기본 정신인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잘 구현한 작품입니다. 오른쪽 화면 위에는 다른 종이에 써서 오려 붙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화상찬(畵像讚)이 

적혀 있습니다.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고 내가 아니라 해도 나다. 그래서 나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만한게 없다. 제석의 여의주가 주렁주렁한데 누가 큰 마니주 앞에서 모습에 집착하는가. 하하, 과천노인 스스로 짓다. 

추사 선생은 누군가 이 자화상을 보고 자신의 실제 모습과 "같다" "다르다"라는 품평을 할 것으로 생각되었는지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고 합니다. 이는 언뜻 초상화의 닮음을 이야기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모습과 진짜 자신에 대한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와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만한게 없다는 뜻은 진여(眞如), 즉 변화하는 세계와  변화하지 않는 존재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으로의 불교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추사 선생이 연이은 유배 생활과 부인을 비롯한 친인의 죽음, 풍비박산난 가문, 곤궁한 생활속에서도 말년에 이렇듯 소박하고 평범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던 힘은 

불교적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김정희는 젊어서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추사의 별호인 중에 부처의 종이니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라는 뜻의

불노(佛奴), 고요하게 선정에 든다는 뜻의 정선(靜禪), 인간적 사회적 능욕을 참는 수행을 하는 불자란 뜻의 찬제거사(羼提居士)도 불교와 관련된 호입니다. 

'천축고선생'과 '나가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사는 경전에도 매우 밝아 대승경전은 물론이고 아함경(阿含經)과 명상법인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도  공부했습니다. 

또 초의선사에게 전등록(傳燈綠)을 요청하였고 불교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법원주림(法苑珠林), 종경록(宗鏡錄)을 구하여 읽었을 정도로 불경 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에 심취하여 불경을 구하여 읽으면서 불교에 대해서 공부한 결과 추사는 쟁쟁한 선사들과 논변하고, 기도를 등한시하며 화두만 들고 있는 승려들을 

비판하고 염불을 강조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그리고 말년에는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불자의 삶을 살았습니다.그리고 죽기 3일 전에 병든 몸을 일으켜 

봉은사 경판전 "판전" 현판을 썼는데 마치 어린애가 쓴것 같은 아무런 사심과 욕심 없는 천진 무구한 명작을 남기게 됩니다.이 판전 글씨를 항간에서는 동자체(童子體)라고

하기도하며 서울시는 이 판전 현판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5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이 글씨를 쓰시고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의 마지막 기력을 이 글자에 쏟아낸 것입니다. 불자이자 위대한 학자이고 당시 동아시아의 서화, 금석학의 최고봉이었던 추사 선생은 이렇게 세상과 작별하였습니다.

그런 추사의 마지막이 보고 싶지 않았는지 초의선사는 장례식에는 참여하지 않고 멀리서 추사를 배웅하다가 사후 2년후 탈상 바로 직전 

상주를 찾아와 애통한 심정의 제문을 바칩니다. (제문)~ 슬프다 ! 선생이시여. 사십이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않고 저 세상에 가서는 오랫 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손수 달인 뇌협과  설유의 차를 함께나누며 슬픈 소리를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시곤 했지요. 생전에 말했던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를 잃은 나의 슬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나이다. 시비의 문을 벗어나서 환희지에서 자유로이 거니시겠지요. 연꽃을 손에 쥐고 안양을 왕래하시며 거침없이 흰구름 타고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누가 감히 막을수 있겠습니까? 가벼운 몸으로 편안히 가시옵소서 (초의선집中). 세상이 아무리 자신을 속여도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 나선 추사 김정희. 

그가 직접 그린 자화상을 보면서  스스로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글씨 내용 참조

동양미술 작가-손태호 

인더스 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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