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희망을 담은 새김질, 서각을 대중 문화예술로 저변을 넓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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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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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 파워코리아 |
링크 | http://www.powerkoream.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4167 |
소망과 희망을 담은 새김질, 서각을 대중 문화예술로 저변을 넓히다
성헌서각(惺軒書刻) 김기철 각수(刻手)
‘서각(書刻)’이란 글씨나 그림, 특이한 문양등을 목재나 석재등의 재료에 새기고 칠을 하여 완성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 예술의 한 갈래이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문자나 회화를 목재, 석재 등의 재질에 새겨서 기록함으로써 후세들에게 그 뜻을 오래도록 전하고픈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각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나무 판재에 전통적인 각법으로 새김질하여 완성하는 전통서각과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여 새로운 감각의 조형을 완성하는 현대서각으로 구분되어 계승·발전되어 오고 있다.
전통 서각예술에 매료되어 30년 외길을 걷다
현대 문명이 발달하고, 각종 첨단 인쇄기기가 등장하면서 종이 매체가 가진 기록물로서의 의미는 다소 희미해졌다. 오늘 날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을 통해 얼마든지 생활 가까이에서 지구촌 세계인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 등을 수시로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무 판재에 글자를 뒤집어 붙여서 새기고 인출하여 문서나 책으로 사용하는 목판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글자 하나를 새기는 데에도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은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에게 치명적인 단점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판각은 여전히, 아니 과거보다 더 큰 의미의 가치를 지닌 전통예술이다.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어 가는 현대에서 서각의 ‘느림’에 담긴 정성과 열망은 그 소중함과 진실함을 더욱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목판각의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판각의 유물을 상징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이다. 총 8만 1258판에 달하는 팔만대장경 경판은 몽골의 외침이 계속되던 시절,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만들어졌다. 부처님을 향한 간절한 염원과 호국의 바램을 담아 판재를 수집하고, 경전을 필사하고, 숙련된 각수들은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세 번씩 했다고 하니 그 정성과 간절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정성의 마음으로 요즘에도 판각에 전념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대장경 판각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각수로 평가받는 인물인 성헌서각의 김기철 각수(刻手)이다.
김기철 각수는 1985년부터 구암 윤영조 선생의 문하에서 한글 서예를 익히던 중 1987년 철재 오옥진 선생의 제자들이 개최한 서각 전시회인 “철재 각연전”을 관람하면서 당시 서울시 행정직 공무원이었던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당시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 걸려있던 서각 작품을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였으며, 당시 철재 오옥진 선생의 제자이며 “철재 각연회” 총무였던 석촌 김상철 선생을 찾아가서 서각에 입문하고 수 년 동안 전통 서각의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이후 서예와 전통서각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던 그는 1991년 고교 은사님이자 당시 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이신 근원 김양동 선생님의 문하인 근묵회에 들어가서 한문 서예를 배우게 된다. 김기철 각수는 당시 전통서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근원 김양동 선생님에게 말씀드렸고근원 선생님은 그에게 전통적인 목판각의 배자 및 판각 방법, 인출 과정등을 고증을 들어서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으며, 중국과 일본의 판각 문화와 서각 제작 방법등을 비교 분석하여 가르쳐 주셨다 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당시 근원 김양동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의 미래의 인생에 또렷한 지침이 되었으며, 그 이후 전통서각 작업에 대한 소중한 마음 가짐과 좋은 인연으로 내가 선택 받았다는 생각은 그의 자긍심을 크게 일으켜 그 이후 생활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언제라도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10년 동안 근무하던 서울시 행정직 공무원을 그만 두고 서각 전업작가로서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전통 예술시장의 수요와 인식의 한계에 부딪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수에 대한 꿈과 냉정한 현실의 삶을 고민하고 있던 중 당시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존연구원’ 기획실장인 능도스님으로부터 대장경 판각을 할 수 있는 각수로 초빙되어 2001년 봄 그는 서울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합천 해인사로 내려가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 경판을 복원하는 작업에 각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소중한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새겨내다
그 후 5년 동안 그는 해인사 요사채에서 숙식하면서 해인사에서 필요한 70여판의 대장경 경판을 제작 하였다 한다. 2005년 12월, 해인사에서 각수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예전에 살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해인사에서 가까운 합천군 묘산면에 귀촌하여 살면서 개인적인 판각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에 살고 있는 이유는 그에게 시대적인 사명감과 좋은 인연으로 접하게된 대장경 판각작업을 지속하게 된 소중한 기회와 고려시대에 대장경 판각에 참여했던 각수들의 애환을 가까이에서 느껴보기 위함이라 한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서각가로서는 유일하게 많은 방송국과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으며, 지금도 서각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판각 작업 과정은 국내 방송 3사 및 경인방송, 일본 NHK , KBS 문화산책 등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그가 만든 목판 대장경판은 브라질, 터키, 폴란드 대통령과 티벳왕사인 링린포체, 달라이라마 존자, 미국 버클리대 박물관, 시카고대학, 일본 교토 불교대학 등에서 소장되고 있다. 또한 그는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국가지정 중요 전적문화재 원문DB 구축사업’에 국내각수로서 유일하게 참여했으며 해인사 팔만대장경축제, 대야문화제, 대장경천년 세계문화축전, 대구 팔공산 승시 등에 참여하며 우리 전통예술인 서각을 많은 대중들에게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 전통서각의 가치를 지키는 일
지난해 1월 완공돼 경남 합천군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대야성에는 합천 출신의 서예가 직암 이수희 선생이 쓰고 김기철 각수가 새긴 대형 현판이 걸려있다. 금박으로 마무리해 영구보존 될 이 현판에는 대야성 준공을 토대로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치열했던 전쟁의 역사를 되새기고, 미래의 발전을 꿈꾸는 합천 지역민들의 의지와 열망이 담겨 있다.
또한 김기철 각수는 지난해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크고 무거운 대형 현판을 제작한바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산문에 자신의 스승인 서예가 근원 김양동 선생님의 글씨 ‘조계선풍 시원도량 설악산문(曺溪禪風始原道場雪嶽山門)’의 현판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오늘도 꾸준하고 왕성한 전통서각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기철 각수가 작품 활동을 이어나감에 있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고객과의 인연과 최선을 다해서 완성도를 높이는 작품이다. 그러한 인연과 작품을 임하는 마음가짐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고, 또 앞으로 먼 후대에까지 이어져 나갈 서각예술의 근본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서각예술이 다른 예술장르와 다른 점은 그 작품이 담고 있는 마음의 크기라 생각합니다. 회화나 조각 등의 예술품들이 작가들의 투철한 예술정신과 혼을 담고 있다면, 서각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바람, 간절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그가 최근에 작업했던 신흥사 설악산문 현판은 세상을 구제하려는 부처의 자비심과 끊임없이 정진코자 하는 수행자의 올곧은 정심(正心)이 담겨 있으며, 대야성 현판 또한 삼국 통일의 토대가 된 합천군의 역사성을 재조명함으로써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화합을 일궈내 더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어가기 위한 전환점을 세우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있다. 김기철 각수가 생각하는 ‘각수로서의 역할’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작품을 의뢰하는 고객의 마음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이 겉보기에 화려하고 빼어나기만 한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이에 그는 고객과의 약속을 성실히 지키는 것부터, 이후의 변색이나 훼손 등작품을 관리하는 일까지 고객과의 유대와 함께 꼼꼼히 신경 쓰고 있다고 한다.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나 고려의 초조대장경처럼 천년을 이어갈 수 있는 명품 서각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는 김기철 각수. 그의 작품을 향한 올곧은 정신이 후손들에게 길이 기억될 새로운 문화유산을 탄생시킬 바탕이 되길 바란다.
Seogak (letter carving on wood) spreads wish and hope to people
Seogak master Sunghun Kim Ki-chul of Sunghun Seogak
30 years of single path as a seogak master
People nowadays acquire vast amount of information from their smart phone or computer. In the past, people recorded information on paper or carved the letters on wood to pass it down to offsprings. And the process took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and effort. In the age where things are fast produced and consumed today, the beauty of slowness of 'seogak' can put a stop to the movement of the people just for a while to think things over for it presents precious and truthfulness. A story goes that the carvers of the Tripitaka Koreana bowed three time when each word on the whole 81,258 boards was carved from which we can glimpse the desperate wish and hope of the carvers. And the tradition is well passed down today to seogak master Kim Ki-chul, known as the best in the field. He took charge in gakjajang (calligraphic engraving) of the recovery of the Tripitaka Koreana, the project which took 5 years from 2001 to 2005. It was a truly valuable experience for Kim. Kim used to work as a public servant and learned Korean calligraphy from Guam Yoon Young-jo from 1985. When he saw the 'Chuljae Gakyeon' exhibition held by the pupils of Chuljae Oh Ok-jin in 1987, he was overwhelmed by the force it bursts out and paid a visit to Oh who accepted him as his seogak pupil. Kim then deepened his skill under the instruction of Wonkwang University calligraphy professor Kim Yang-dong in 1991. "I could be able to expand my knowledge on wood carving to a great level thanks to his vast knowledge about seogak in Korea, Japan and China" said Kim in retrospect. Kim's passion in seogak truly was busting out from then on but the public recognition and market demand for the works were very weak and Kim was rather discouraged thinking whether he should stop there. Engaging in the recovery of the Tripitaka Koreana in 2001, however, saved Kim from the despair to keep carrying on his profession.
A masterpiece comes from sincerity
He stayed at Haeinsa temple for 5 years and made 70 boards of the Tripitaka Koreana. Completing the work in December 2005, instead of going back to Seoul, he settled down Yaro-myeon, Hapcheon County near Haeinsa temple, where the Tripitaka Koreana is kept, in order to feel the spirit of the seogak masters of the Goryeo Dynasty era who took part in carving the Tripitaka Koreana. Remarkable feat as it was, Kim's works were broadcast on the KBS, MBC and SBS as well as the NHK Japan. Some of the works were given to the presidents of Brazil, Turkey and Poland as well as Ling Rinpoch of Tibet as a gift and some of them are kept in University of California Museum, Berkeley, US, University of Chicago, US and Ōtani University, Kyoto, Japan. Since then, he was invited to various government projects including archiving of letters and signs as well as local cultural festivals.
Spreading the beauty of seogak
There hung a signboard on entrance of Daeyasung, the recently built landmark of Hapcheon County. It is a work of the local calligrapher Gikam Lee Su-hee and seogak master Sunghun Kim Ki-chul. It is rimmed with gold to remember the war between the Silla Kingdom and Baekje Kingdom held at Daeyasung in 642 and to contain wishes and hopes of the local residents. Kim also carved letters on the Korea's largest and heaviest signboard hung at Sinheungsa temple written by calligrapher Geunwon Kim Yang-dong. Kim takes every single order of his client as a future cultural asset and for this reason pours his whole heart into each work. "The difference of seogak from other crafts or art is at the size of the carver's mind. If other forms of art contain artistic spirit and soul, seogak does wishes and hopes of the people." Therefore, reading the wishes and hopes of the people is more important than making the surface beautiful or splendid. Kim also revisits the works he carved every now and then to check whether the sincere heart he poured into is intact and to repair when not. <Power Korea> hopes that Kim's masterpieces will one day be important cultural assets of Korea and spread the excellence of Korean seogak to the world.
임세정 기자 cream132@naver.com